나의 이야기

[여행]아름다워 슬픈 여강...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그길

봄의화신 2010. 7. 2. 17:38

[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天地無涯生有涯)/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갈 것인가(浩然歸志欲何之)/여강 굽이 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廬江一曲山如畵)/절반은 단청같고 절반은 시와 같구나(半似丹靑半似詩)

여강((麗江ㆍ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여주 땅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나타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여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여주에서 그림같고 시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강의 풍경이다.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는 남한강이 여주를 감고 돌면서 비로서 여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청ㆍ강원은 물론 영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강줄기를 여주 사람들은 '여강 백리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 했다.

언제나 사람과 풍성한 물자로 흥청거렸던 이곳도 철도와 고속도로의 등장에 잊혀진 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무심히 강물만 흐르던 여강에 최근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고 있다. 여강의 아름다움을 찾아 생태 탐방에 나선 이들이다.

문화단체 강길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여강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강길은 3개 코스에 총 55km에 이른다. 시종 여강의 물길을 따라가는 이 길은 겹치거나 되돌아오는 구간이 거의 없다. 그 덕택에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운 풍경과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여강길 일부는 공사트럭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4대강 사업인 여강 강천보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보를 세우면 사실상 여강길의 훼손이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고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은 보고 있다. 머지않아 문화와 생태가 '있는'길이 아닌 '있었던'길이 될지도 모르겠다.

늦었지만 지난 주말 그리워도 다시 못 볼 수 있는 여강길을 찾았다.
55km를 하루에 다 걷기란 벅차다. 먼저 영월루에서 시작해 은모래ㆍ금모래, 부라우나루터, 아홉사리과거길, 도리마을로 이어지는 1코스 15.4km(5~6시간소요)를 걸었다. 이길은 일명 '나루터길'이라 불린다. 부라우와 우만리, 흔암리 등 이름만큼 아름다운 나루터의 흔적들을 더듬는 길이다.

강변의 바위절벽위에 올라앉은 영월루에 섰다. 여주대교 일대의 남한강과 여주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강바람이 머릿결을 스친다. 굽돌아 가는 강물을 따라 황포돗배가 유유히 여강을 미끄러진다.

본격적인 길이 시작되는 신륵사 맞은편에는 우리나라 유원지 중 가장 어여쁜 이름을 가진 은모래ㆍ금모래유원지가 있다. 햇빛에 비친 고운 모래가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반짝이는 은모래 금모래는 찾아 볼 수 없다. 4대강 공사차량이 뿌연 먼지를 날리는 공사판이 되어 있다. 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박희진 강길사무국장은 "지난해 열린 여강길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속 강변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면서"하지만 4대강 공사가 후 자연이 파괴된 한강둔치 같은 인공적인 강변길이 될게 뻔하다"며 우려했다.

그녀의 우려는 벌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여강길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 하지만 4대강 논란에 새삼 애틋한 마음으로 이 길을 찾는 시민ㆍ사회단체 회원들은 늘었다. 어쩌면 다시 못 볼 길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부라우나루터로 향했다. 다리가 놓이고, 길이 좋아지면서 지금은 자취도 없어지고 말았지만, 여강에는 한 때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비롯해 총 17개의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부라우나루터와 우만리나루터 앞에는 수령 300년쯤 되는 느티나무가 굳건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성성한 기둥 못지않게 고루 펴진 가지는 넓은 그늘을 드리웠다.

이 중 부라우나루는 여강변 나루터 중에서 풍광이 가장 빼어난 곳이기도 했다. 강변으로 돌출한 바위가 거센 강물을 막아줘서 주변의 물살이 잔잔한 천혜의 나루터. 불과 10년 전까지도 배를 띄웠던 곳이란다.

또한 부라우는 '붉은 바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강을 향해 불쑥 솟은 암반에는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의 정자터가 남아 있다. 민진원의 호 또한 붉은 바위를 뜻하는 단암(丹巖). 바위 앞쪽에 또렷이 음각돼 그 시대를 웅변하고 있다.

우만리를 지나면 선사시대 유적이 남아있는 흔암리로 접어든다. 흔암리나룻터는 느티나무가 아닌 미루나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옛날 마을마다 고을마다 강변길에 늘어선 있던 그 미루나무일터. 과거 나루는 바위나 큰 나무를 중심으로 삼아 배를 운행했는데 바로 이 나무들이 그 역활을 했다고 한다.

흔암리를 지나면 이내 아홉사리과거길로 들어선다. 여강길에서 가장 험준하면서도 운치 있고 아름다운 오솔길이 살아있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다.

이길은 흔암리의 청소년수련원과 여흥 민씨 집성촌인 도리마을 사이의 남한강변에 우뚝한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때에도 지나다니던 길이다.

이곳 길가에 핀 구절초를 중양절(음력9월9일)때 캐서 달여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속설도 전해온다.

이처럼 옛길 특유의 사연과 운치,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홉사리과거길은 여강길을 걷는 트레커들에게는 꿈길처럼 황홀하다.

온몸을 적시는 땀방울과 묵직하게 굳어지는 장단지의 힘살이 느껴질때쯤이면 1코스의 종착지인 도리마을에 닿는다.

여강길은 철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박 국장은 "봄에는 짙어지는 초록의 강물 색깔이 너무 좋아요. 여름엔 강수욕을 즐기고 달빛 쏟아지는 강길을 걸을 수도 있지요. 가을엔 끝 간데 없이 핀 물억새와 겨울의 눈내린 강변의 다양한 철새들의 자태가 아름답다."고 자랑한다.

여강길은 지루하지 않다. 조약돌로 물수제비를 뜰 수 있고 동물발자국과 희귀식물도 찾을 수 있으며 강을 울리는 메아리도 들어볼 수 있다.

자갈길과 모랫길, 억새길, 늪지길이 번갈아 나오는 그 길을 걸으면 이야기가 있고 유적도 있다. 그리고 눈물도 난다.

돌아서는 발길이 왠지 짠하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것 같은 불안감에 걸어온 길을 자꾸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본다. 그래서 또 눈물이 난다.

여주=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을 나와 37번도로를 타고 여주 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가다보면 은모래유원지(강변유원지)가 나온다. 개별적으로 탐방시 이정표와 나무 등에 매 놓은 파란색 리본 등을 잘 살펴보고 가면 된다. 여강길단체탐방에 대한 문의는 강길(031-884-9089, 016-744-3930)로 하면 된다.

△먹거리=
여주읍 오금리에 지역민들이 자주 찾는 (구)보배네만두(031-884-4243)가 있다. 직접만든 손만두와 손두부 맛이 일품. 바위늪구비로 가는 강천면 굴암리에 있는 굴암매운탕(031-882-6382)도 맛깔스럽게 음식을 낸다.

△볼거리=
여주에는 오랜역사만큼 볼거리가 많다.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인 녕릉(寧陵)이 있다. 이밖에도 강변사찰 신륵사와 명성황후 생가, 고달사지, 목아불교 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